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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지길' 野史 _ 건축평론가 이용재씨의 글

理想寒 2008. 5. 12. 07:55

쌈지길

2000년 종로구 관훈동 50번지의 유명한 불고기집 <영빈가든>에서 화재가 난다. 
<쌈지>에서 대지 450평을 구입해 전통 쇼핑몰계획에 착수한다. 

<쌈지>사장 천호균은 경기고를 나온 성균관대 경영학과 67학번이다. 
1984년 30대 중반에 이른바 <거지백>을 들고 대한민국 패션업계를 리드한다. 
거지들이나 들고다닐 법한 아무렇게나 생긴 가방이 대박이다.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편하게'가 디자인 모티브다. 
가방을 왜 꼭 불편하게 들고 다녀야 되냐. 가방을 입고 다닌다. 이게 <쌈지>다. 
'내 패션은 내가 고른다.' 남성브랜드 <놈>이다. 
톡톡 튀는 10대는 <딸기>로 공략한다. 이제 브랜드만 9개에 연매출액 1,500억이다.

2001년 천호균은 최문규를 찾는다. 
최문규는 연세대 건축과 80학번이다. 
대학원 마치고 1988년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 떠난다. 
스티븐 홀(1947년생)과 이토 도요(1941년생)에게 사사한다. 세계적인 거장들이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이토 도요 사무실에서 1년 반 실무를 배운다. 
1992년 귀국해 컬럼비아대 선배인 이성관 소장이 운영하는 한울건축에 근무한다. 
1999년 가아건축연구소 설립한다. 불혹 언저리에 독립이다. 
영어로 하면 ga/a다. 가나다라의 첫글자 가와 a, b, c, d의 첫 글자 a가 결합해 
가아가 된다. 

간단하다. 동, 서양을 아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쌈지사장은 친한 건축가가 많지만 이번에는 전혀 모르는 건축가와 하고 싶단다. 
말 나오는 것도 싫고. 파주 <딸기파크>와 인사동 <쌈지길>을 동시에 계약한다. 시원해서 좋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동네이름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자만 따서 仁寺洞이 된다. 
조선 중기 이후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김좌근, 김병학 등이 이곳에 살았다. 
조선 후기 명성황후가 뜨면서 민익두, 민영익 같은 민씨들이 
안동 김씨로부터 인사동을 접수한다.
1910년 나라가 망하면서 왜놈들이 인사동 접수한다. 
왜놈들은 지금의 인사동 길을 흐르던 개천을 복개한다. 
이제 대궐 같은 양반가옥들은 잘게 찢겨 이른바 개량한옥이 된다. 
가세가 기운 북촌양반들이 하나둘씩 공예품을 내다 팔면서 문화거리가 시작된다. 
1945년 왜놈들이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대량으로 공예품 내다 팔아 본격적으로 인사동 거리 뜬다.
1980년대 후반 강남 뜨면서 40%정도의 중요 갤러리들이 강남으로 빠져나가면서 위기에 처한다.
1997년 주말에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자 다시 인사동 뜬다. 난리가 났다. 
전체 800개 공예품 점포는 하나둘씩 음식점으로 변해간다. 
먹는장사가 최고인 거 아시죠. 1년 반 동안 모든 건축허가는 중단된다. 
1999년 종로구청은 인사동거리 살리기 현상설계 공모한다. 당선작 김진애. 
2000년 36억 들여 바닥에 전돌 깔고 장대석, 사고석 세우는 문화거리 조성공사가 시행된다. 
아빠 사고석이 뭐야. 사방 18센티 정도의 상자형 화강석이 사고석이다. 담장 쌓는데 사용한다. 
이 돌덩이들을 그냥 인사동거리에 툭툭 던진다. 역사를 추억하기 위한 장치다.

시정개발연구원은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설계지구 단위계획을 수립한다. 
저질의 건축을 방지하는 법이지만 역으로 최고의 재능 있는 건축도 방지하는 
그야말로 어정쩡한 중간의 디자인을 양산하는 법이다. 
4군데는 특별설계구역으로 지정된다. 이곳 50번지는 특별설계구역에 포함된다. 
인사동 거리에서 제일 큰 450평의 필지라 그렇다. 
최문규는 모르고 들어 왔다. 이제 죽었다. 

<걷고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는 50번지 전면의 12가게 살리기에 나선다. 
인사동거리 중앙의 다 쓰러져가는 단층의 12개 가게를 보존하라 훌라훌라.  
1만 5천명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들이댄다. 나 원 참. 인사동 개발의 모범을 보이라는 야그다.
평당 4천만 원에 200억 주고 50번지를 사들인 쌈지는 독박쓰게 생겼다. 
일반상업지역 땅이라 예상보다 비싸다. 
도로면 에서 5미터까지는 단층으로 하고 12가게를 재현할 것. 특별법의 위력이다. 
전면도로에 면한 40미터x 5미터=200제곱미터 60평은 인사동 길에 헌납한다. 
땅값 24억 기부. 뚜껑 열린다. 벌어도 현찮을 판에. 
특별법 2/ 1층에는 음식점 두면 안됨. 돈다. 
아니 1층이 노른자위인디 돈 되는 업종 두면 안 된다고나. 
특별법 3/ 대지면적의 10% 이상 중정 만들 것. 그래 열받아 아예 30% 중정 만든다. 
특별법 4/ 지상면적의 300평 이상은 상가로 할 것.
1년 반 동안 시달린다. 4단계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청기와 씌워라. 고렇겐 못한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왜 꼭 기와 씌우라고 하냐. 
기와는 목구조일 때 사용하는 지붕재다. 청와대가 문제다. 
콘크리트구조물에 청기와는 왜 얹냐. 
경복궁 근정전이 아트인 건 순수 목구조에 기와를 얹었기 때문이다. 
야, 그럼 양복입고 갓 써 봐라. 볼만할기다. 관두자. 직원들이 말린다. 
계속하자. 역사에 남기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먼저 인사동거리의 상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디오로 촬영한다. 
그중 인사동에 있으면 안 되는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빼나갔다. 
그렇게 제하고 남은 500미터의 거리풍경을 골목길을 이용해 하늘로 끌고 올라갔다. 
인사동거리의 파사드(facade). 건물의 전면을 파사드라고 하는 거 아시죠. 
스트리트 스케이프(streetscape). 얼굴을 하늘로 끌어올린다. 접는다. 
이거 말 되나. 거리풍경을 접어 하늘로 올린다는 야그다. 
램프를 돌아 올라가야 되니 접고 꺾어야 된다. 
우선 땅을 죄다 파내 지하 2층은 주차장. 지하 1층에 시장터를 만든다. 북적북적거린다. 
1층으로 올라오면 대지 좌측으로 기존 평면과 같은 모양의 
비틀어지고 들쑥날쑥한 3 가게가 재현된다. 
있던 건물 그대로 재현하는 걸 건축용어로 개축이라고 한다. 
재건축은 법망을 이용해 돈을 만드는 방식이지만 
4천만원 땅에서의 개축은 그야말로 죽으라는 야그지만 방법이 없다. 
좌측에서 4번째 칸이 한 스팬 4.8미터로 열리면서 개구부가 된다. 
아 참 기둥과 기둥 사이를 스팬이라고 한다. 
다시 9개 옛 상점 평면이 그야말로 골 때리는 모양으로 반복되면서 단층 파사드가 재현된다. 
직원들 도면 비틀어 돌리다가 돈다. 개구부 들어가면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기 시작한다. 계단과 램프가 계속 반복되면서 올라간다. 
인사동 골목길의 재현이라 4층까지 올라가는 골목길은 
넓은 때는 2.7미터에서 좁을 때는 1.8미터까지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한다. 
30센티 넓어졌다 30센티 줄어들고. 반복. 진짜 돈다. 이걸 컴퓨터로 그리라고. 
램프의 경사도는 1/25이다. 사람이 두발짝 갈 때마다 4센티 정도 올라간다.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경사도다. 골목길의 재현이라 그렇다. 이제 건축은 건물이 아니다. 

작가의 표현대로 하면 1층의 <첫걸음길>은 디자인 문화상품을 판다. 
인사동의 스트리트 스케이프를 한 번 접은 2층 <두오름길>은 현대공예공방이. 
두 번 접은 3층 <세오름길>은 전통공예공방들이. 
세 번 접은 4층 네오름길은 전통음식점이 늘어선다. 더 이상 못 올라간다. 
다른 일반상업지구는 수십 미터 올라가지만 
이곳은 문화지구 특별법 때문에 18미터 이상은 못 올라간다. 
그래 최고 건축물 높이는 16미터에서 멈춘다. 
국회에서 아무리 건축법을 만들어도 지방자치제의 실현으로 구청의 건축조례가 더 힘이 쎄다. 
램프로 올라가다 지루하면 좌우 측에 설치된 계단으로 내려가면 된다. 
또 궁금해. 그럼 다시 올가가면 된다. 이렇게 돌고 돌다보면 72개의 상점들을 만날 수 있다. 

가게 하나의 전용면적은 8평이다. 반으로 나눠 써도 되고 2, 3개 이어 써도 된다. 자신 있으면. 
건폐율은 최고 60% 넘을 수 없다. 
대지의 60%는 채우고 40%는 비워두거나 나무 심어야 된다는 야그다. 그래 59.5% 찾아 먹는다. 
나머지 땅은 중정이다. 프리마켓이다. 
입춘, 단오절, 칠월칠석 같은 명절에는 문화공연이 펼쳐지고 
주말에는 입주자 위주로 야외장터가 생긴다. 중정은 곧 프리마켓이 된다. 좋다. 
5일장도 좋고 7일장도 좋다. 
월 임대료 없다. 각 임대자는 매출액의 30%를 주인에게 납부하면 된다. 백화점 방식이다. 
장사가 안돼! 그럼 나가면 된다. 아참 글구 요새 유행하는 권리금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장사 잘된다고 개인적으로 웃돈 받을 수 없다. 그냥 싫으면 나가면 된다. 쇼핑몰이다. 

일반상업지구의 용적률은 400%지만 이곳 쌈지길의 용적률은 150%다. 
대지를 4번 가득채울수 있는 면적만큼 하늘로 올라 갈 수 있는 게 용적률 400%다. 
대지를 한 번 반만 채울 수 있는 면적이면 수익성이 그만큼 떨어진다. 좀 어렵나. 그래도 좋다. 
꽉 채운다고 장사가 잘 되는 건 아니니까.
이왕 까진 김에 각 점포의 전용률도 65%에서 50%로 떨어진다. 
이게 뭔 말이냐. 8평 임대 계약하면 그중 4평은 골목길이라는 야그다. 
그래도 임대자들은 좋단다. 왜냐고. 
우찌됐든 인사동의 하루 15만 명의 고객들을 이곳 <쌈지길>로 유인하는 게 목표라 그렇다. 
얼떨결에 공사 수주한 건설회사도 돈다. 낮에는 인사동 길에 공사차량 끌고 들어 올 수 없다. 
주말엔 아예 안되고. 밤마다 레미콘 타설한다.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 치고 안도는 사람이 없다. 
건축가가 돌아야 사용자는 안도나! 내 다시는 인사동에 들어오나 봐라.

이제 건축가가 만든 노출콘크리트 회색벽을 화가 이진경이 나서 아트를 연출한다. 
회색벽에 대한 반발로 원색이 강조된다. 
1층은 생명력의 상징인 버드나무를 사용해 봄을. 2층은 개구리, 빨강, 꽃으로 여름을. 
3, 4 층은 해, 산, 황토로 가을을. 지하층은 새와 보라색으로 겨울을 연출한다. 
한 건물에서 비발디의 4계를 다 들을 수 있다. 
매장 안내사인도 독특하다. 
화가가 밑그림을 그리고 상가 주인들이 각기 자신의 상호를 직접 쓰게 했다. 정성이다. 
디자인을 파는 <쌈지>답게 모든 참여 디자이너들의 독창성을 인정한다. 
콩놔라 팥놔라를 외치는 대한민국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주인이 처음 제안한 쌈지공예골목이라는 건물명도 건축가가 제안한 <쌈지길>로 개명한다. 
우리 이름이라 더 정겹다. 건물이 길이라. 아트다. 
재료느낌 그대로 늙어가라. 이제 건축은 길이다. 골목이다. 
이제 장터도 마련됐으니 마음껏 먹고, 놀고, 보고, 즐기자. 누가 건축을 어렵다했는가. 
노래가 절로 나온다.   

"골목길 접어들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 보았지
수줍은 너의 얼굴이 창을 열고 볼 것만 같아
마음을 조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 보았지
만나면 아무말 못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가면서 후회를 하네"

신나는 건축이다.



건축평론가 '이용재' 씨의 '쌈지길' 발췌



이용재_건축평론가, 택시기사

1960년 서울생
문학도를 꿈꾸나 군인아버님 반대로 건축과 입학
건축과 대학원에서 건축평론 전공
글쟁이를 꿈꾸나 배고픔에 회의를 느낌
1989년 잡지사 탈출, 건축전문출판사 설립, 내는 책마다 적자
1990년 빚더미속에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결혼
1991년 12월 외동딸 출산
1993년 건축출판계 떠나 노가다현장 진출
1997년 IMF 전재산 탕진, 감옥도 다녀옴
전업주부로 또다시 업종변경
2000년 건축잡지사 편집장으로 복귀, 다시 박봉, 편집인과 갈등 & 사직
2001년 건축현장 감리로 취직, 부실공사 유혹에 맞서다 잘림
2002년 도사들의 추천으로 택시기사 시작, 일요일 가족답사가 유일 즐거움
 초등학교 4학년 딸의 본격적인 인문학적 교육 돌입
 이 험난한 세상, 착하게 사는법 가르치기 시작함
주변에서 자꾸 글쓰라고 꼬득임, 11년만에 청탁도 없는 블로그 글쓰기에 돌입
2003년 블로그 글을 모아 '좋은물은 향기가 없다' 출간, 대박
 but...역시 돈은 안됨, 이름 석자만 유명세를 탐,
 언론계의 주목을 받으나, 택시기사라서 그런거 같음,
 공중파 방송 등 80여개 언론매체에 등장
2005년 '왜이렇게 살기가 힘든 거에요' 출간
2007년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 1,2,3 출간